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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영화제

박윤교 감독의 공포영화

망령의 웨딩드레스The Haunted Wedding Dress

박윤교

Korea1981 92min 35mm Color

시놉시스

신달산업의 사장 김영하는 운전 도중 한 달 전에 자신이 죽인 정임과 똑같이 생긴 마네킹을 차로 들이받는다. 그 날부터 영하의 집에는 이상한 일이 연달아 일어난다. 영화는 8개월 전의 기억을 떠올린다. 영하는 정임과 우연히 동승하게 된 인연으로 별장에서 같이 지냈다. 그 때 영하는 정임을 범하고 둘은 이후 내연의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정임이 영하에게 계속 계획적인 요구를 하자 영하는 정임을 죽여 암매장을 했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 영하는, 정임의 유령이 나타나자 정임의 공동묘지를 확인한다. 그러나 시체는 온데 간데 없고 마네킹만 남아 있다. 그리고 별장에 다시 나타난 정임의 유령. 아니, 그는 유령이 아니라 살아있는 진짜 정임이다. 그제야 영하는 정임이 부모의 원수를 갚고자 이미 15년 전부터 한을 품고 의도적으로 접근해 복수하려 했고, 그간 별장지기 곽노인이 정임을 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검은 웨딩드레스 차림의 정임과 영하는 서로 몸싸움을 벌이고, 영하는 정임과 곽노인을 죽이려다 잘못하여 자신이 우물에 빠져 죽고 만다.

감독

박윤교

Park Yun-kyo

박윤교 감독이 원래부터 괴기영화 전문이었던 것은 아니다. 1966년 <뜬구름아 말 물어보자>로 데뷔하여 70년 무렵까지 그는 <백발의 처녀>(1967), <백골령의 마검>(1969)같은 괴기영화뿐 아니라 멜로드라마 <엄마기생><1968>이나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소재로 한 오락활극인 <호피판사>(11970)같은 영화도 만들고 있었다. 그의 이력이 괴기영화 전문으로 굳어지게 된 것은 70년을 전후한 한국 영화산업의 변화와 깊은 연관이 있다. <BR>60년대 말 70년대 초는 한국영화가 양적인 팽창을 이루는 가운데서도 70년대의 쇠락을 예고하는 여러 가지 조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지방흥행과 2번관, 3번관의 흥행을 염두에 둔 제작자들의 저예산영화가 특정 장르를 중심으로 등장하고, 대중의 호응을 받지 못한 국책영화, 문예영화들이 ‘우수영화’라는 이름으로 주류의 왕관을 차지하기 시작하던 것이 바로 그 때였다. <BR>1967년에 <월하의 공동묘지>(권철휘)가 성공을 거두며 산업적으로 유의미한 장르로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던 괴기영화는 숱한 속편을 쏟아내며 대표적인 지방흥행 영화가 되었다. 한국 괴기영화는 봉건사회의 농촌공동체에서 전승되던 전래의 괴기담을 주요 원천으로 삼았으며, 그런 만큼 도시적 감성보다는 지방적 감성에 호소하는 장르였다. 산업화가 지상명제였던 시대에 괴기영화의 ‘회고적’ 취향은 주변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으며 ‘여귀의 귀환’을 핵심으로 했던 괴기영화는 주변적인 정서를 다루기에 특히 적합했다. 산업화의 희생자들, 즉 저곡가정책으로 인해 붕괴되어가고 있던 농촌의 아낙네들과, 도시로 떠밀려와 식모, 여공 등으로 소모되고 있던 저임금 여성노동자들의 값싼 오락이었던 괴기영화는 그들의 ‘한’을 여귀의 복수를 통해 풀어주었다. 60년대 후반에 데뷔했던 감독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을 뿐이었다. ‘우수영화’와 ‘싸구려 영화’. 박윤교 감독은 후자의 길을 택했으며 이는 당시의 많은 감독들이 선택한 길이기도 하다. 그가 택한 후자의 길에서 특히 ‘괴기영화’가 두드러지게 된 것은 1972년작 <옥녀의 한>이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당시 떠오르던 여성 스타 윤미라를 내세워 흥행에 성공했고, 뒤이어 <며느리의 한>(1972)으로 이어지면서 “윤미라-박윤교 감독식의 재래종 괴기영화”(국제영화, 73년 10월호)라는 ‘상표’를 만들어냈다. <옥녀의 한>의 윤미라는 <월하의 공동묘지>의 강미애나 <천년호>(1968, 신상옥)의 김지수처럼 처연하고 애잔한 귀신이 아니라 ‘섹시한 귀신’이었으며 이는 70년대 이후 한국 괴기영화의 여귀들을 (특히 마케팅 차원에서) 특징짓는 핵심적인 성격이다. 물론 그것은 70년대 한국영화의 ‘성의 상품화’ 경향과도 관계가 깊다. <BR><옥녀의 한> 이후 박윤교 감독의 이력은 한국 괴기영화의 궤적을 따라간다. 70년대 중반 이전 <며느리의 한>, <꼬마신랑의 한>(1973), <낭자한>(1974)으로 이어지는 ‘한’ 시리즈는 괴기영화의 속편시대를 반영한 것이었다. 70년대 중반 이후 괴기영화가 합작이나 해외 로케이션을 통해 이국적인 스펙터클을 전시하는 것으로 돌파구를 찾을 때 그는 <낭화비권>(1978), <인무가인>(1980), <요권괴권>(1982)을 만들고 <산중전기>(1979, 호금전)의 한국측 공동감독으로 이름을 올렸다. <BR>80년과 81년에 연달아 만든 <망령의 곡> <망령의 웨딩드레스>는 “재래종 괴기영화”에 매달렸던 그에게 있어서 일종의 전환에 해당한다. 이 영화들은 동시대를 배경으로 삼아 ‘김사장 가족’에게 일어난 괴기스러운 일들을 다루고 있는 연작이다. 김사장 집안을 맴도는 여귀가 바로 부르주아 김사장의 부도덕함, 이기심, 탐욕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들은 당시의 어떤 영화들보다도 동시대적이다. 산업화의 그늘이 직접적으로 드러난 이 두 작품 이후로 박윤교 감독은 다시 회고 취향의 괴기영화로 돌아갔다. <천년호>의 모티프를 따온 <춘색호곡>(1981)과 20년 가까이 괴기영화를 만들며 터득한 모든 기교를 한데 모아놓은 듯한 유작 <월하의 사미인곡>(1985)은 그가 다다른 마지막 경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때로는 매너리즘이 엿보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능숙하게도 보이는 그런 경지였다. (이순진)